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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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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번역: 왜 중요하고 어디에서 시작해야하는가

번역: 윤형민

Boris Buden

Boris Bu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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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g-Min Yoon (tran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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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하나 인용하면서 이 문제를 시작해보자.

 “5년마다 한번씩 카셀에서 매우 중요한 근현대 미술 전시회 중 하나가 열린다.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문화와 예술에 관심있는 사람들, 특히 고등 교육을 받은 중산층 시민들은- 독일에서는 빌둥스뷔르게르툼(Bildungsbürgertum) 이라는 말로 알려진 계층 - 물론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질문이 이들에게 주어진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헤센 시) 독일 시민권 획득을 위한 시험의 85번 항 질문이었다. 이 시험에는 (총 100문제 중) 대부분이 독일의 역사, 의회, 시민의 권리, 정치체계, 문화, 스포츠, 국가의 상징 등 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그 중 몇가지는 꽤 특이하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 가족 구성원 없이는 공공장소에 가거나 여행을 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존재할 권리에 대해 설명하라.”, “만약 어떤 이가 홀로코스트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등등.

 질문의 내용은 일단 미뤄놓고, 이런 질문을 묻는 목적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자.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이 100가지 정답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든 답은 하나의 특정 질문, “독일(인)이란 무엇인가", 즉, “독일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정답은 짧고 재빨리 독일인과 비 독일인들 사이에 선을 긋고 독일인이 아닌 이들을 배제할 수 있는 근본 원리를 드러내야 한다.

 사실 100개 질문 모두 근본 중 근본 원리를 구성하는 질문들 이었다. 악명높은 괴테, 쉴러, 하인리히 보엘과 토마스 만과 같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묻는 독일의 고전문학에 대한 질문들, 가장 큰 독일 강, 가장 높은 독일 산맥, 역사상 가장 중요한 행사들, 가장 유명한 독일 과학자들, 또 물론 “독일식으로 사는 방법”(“진짜 독일식”으로 여성, 어린이, 다른 종교와 의견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물으며 독일 문화 정체성의 잣대가 되는 중요한 문화의 특징과 가치를 결정하는 근본 원리를 들먹으는 질문들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문화의 등장

 이 시험의 내용 및 실행 방식은 정체성 담론의 근본적인 모순, 즉 본질주의자의 주장과 그들이 만들어낸 캐릭터 사이 모순의 완벽한 표본을 보여준다. 이렇게 스스로 구축된 세계는 얼핏 보아 독단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그들의 본래 정치 동기(이슬람 교도를 배척하려는 의도)도 뻔히 드러났다. 다른 한편, 앞서 나열한 질문은 소위 독일만의 독특한 본래적 특징에 결부되어있다. 또는, 본질화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5년마다 카셀 현대미술계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는게 정말 당신을 독일인으로 만드는가?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시민권 시험의 맥락에서 본다면 대답은 “그렇다!” 이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안정된 민주주의 사회에 속할 수 있는 시민권이 주어지느냐 마느냐의 심각한, 또 한 사람의 삶의 질 뿐 아니라 운명이 결정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넌센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말이다. 더욱이 이 넌센스, 좀 더 정확히는 앞서 말한 그 뒤에 있는 이 모순이 누가 속하고 누가 속하지 않는가를 결정해 우리의 정치 현실의 바탕이 되는 힘을 형성한다.

 독일 시민권 시험의 예는 우리 사회와 정치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문화적으로 결정된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잘 보여준다. 이것은 소위 문화 전환 이라 불리는 “포스트모던 징후”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을 설명해준다. 문화 전환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문화가 정치판에서 사회라는 개념을 밀어내고 정치적 과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주역으로 등장한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실 변화는 이보다도 더 급진적이다. 문화는 오늘날 사회의 가능성, 우리가 정치 현실이 무엇인지를 지각하는 조건 그 자체이다. 이것이 바로 왜 오늘날 민주주의, 즉 ,자유와 평등, 사회정의, 복지의 추구 등이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여겨지가 하는 이유다.


문화번역의 역할

 이것이 번역의 개념, 더 정확히는 문화 번역이 중대하게 떠오른 맥락이다. 문화번역은 본질주의와 구성주의 사이의 문화 개념에 대한 모순의 양쪽에 적용될수 있다. 즉, 문화 번역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과 정치 목표의 모순된 인식체계로 보이는 다문화주의와 해체주의 이론을 풀이하데 모두 적용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잘 알려진 바대로 다문화주의 이론은 문화 형성의 독창성 개념이 바탕이 된다. 이 이론은 문화와 인종, 성, 민족의 기원 등이 서로 필수적인 관계에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서 모든 보편적인 생각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보편성 이론에 반대한다. 보편 문화라는 것이 없는 대신, 관용을 가지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폭력적으로 대치상태에 있는 많은 수의 다양한 문화만이 존재한다. 다문화주의자들에게 우리의 세상은 서로 지양할 수 없는 여러 독자성들의 무리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문학에서 다문화주의는 괴테가 말하는 보편인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세계 문학 걸작이라는 개념에 저항하며, 대신 각각을 본질적인 독자성을 지닌 여러 존재로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문학을 논할 수 없고, 독일이나 프랑스, 백인, 흑인, 남성, 여성, 게이 문학 또는 이들의 복합적인 형태로 ‘백인 남성', ‘흑인 여성', ‘라틴 아메리카 흑인 여성' 문학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수 있다.

 다문화주의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을 좌우하는 정치적 실천, 소위 주체성 정치의 근간이다. 이것은 민족 국가라는 획일화된 공간에서 소수와 소외된 공동체의 권리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특정 국가나 인종 그룹의 이른바 독자적이고 순수한 주체성의 보호를 합리화 시키기도 한다.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민주주의, 유럽통합 정책과 같은 경제 발전에 대한 주요 정치적 비전조차 기본적으로 이같은 다문화 형태를 띄고 있다.

 해체주의는 다문화주의가 가진 본질주의의 핵심인 각각의 주체에 이미 정해진 본질이 있다는 개념에 도전한다. 해체주의자들에게 문화란 역사나 육체적 기원이 없는 기술(記述) 의 기호체계다. 기호는 오직 다른 기호와의 상관관계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해체주의 이론에서는 이 개념이 기호와 기호가 아닌 것들 사이의 차이에서 조차 적용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또 다른 기호체계를 구성할 뿐이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기원이란 없고 흔적과 복제만이 존재하며, 진행이나 퇴보의 끝도 없다.

 이 이념은 문화도 어떤 자연 상태의 반영이 아니며 오히려 인종, 성, 민족이나 유전적 본질을 떠나서 제각기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독일인' 이거나 ‘흑인', ‘여성', ‘게이' 등은 단지 문화적 행위의 부산물일 뿐이고 일종의 문화적으로 구성된 존재다. 해체주의는 모든 주체가 애초부터 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다시 한번 국민국가(nations)의 경우에 대해 생각해보자. 국민국가가 오랜시간 지속되어 온 영원한 존재라는 믿음, 한 국가와 다른 국가는 분명히 다른 것이고, 그 사이에 견실한 선이 그어져 있다는 믿음은 분명 존재한다.

 잘 알려진 베네딕트 앤더슨의 문구를 이용해 말하면 이것은 상상의 공동체다. 이것은 소위 국민(또는 민족) 국가라는 단체가 어떤 논변적으로 지어낸 전략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국민국가란 서사 (Nation is narration)라고 호미바바는 말한다. 국가는 인류역사의 한 지점에서 어떤 경제, 사회 문화적 발전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또 사회학자 겔너는 산업화를 국가를 낳는 민족주의의 결과물로 보았다. 즉, 노동과 상품 자유시장, 정부와 떨어져 자주적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출현과 같은 여러가지 조건이 갖춰질 때 하나의 국민국가가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국수주의자들이 지키고 육성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소위 국가의 문화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은 번역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번역의 사회, 정치적 역할은 국민국가 성립의 역사 과정의 바탕에서만이 분명해진다. 오직 이러한 맥락에서 번역이 의미를 갖게되며, 언어의 지평을 초월해 문화 정치 현상이 되는,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문화 번역"이 된다.


그러면 변역이란 사실상 무엇인가?

 전통이론에서 번역은 이원적 현상이다: 번역의 과정에는 언제나 원본 글과 다른 언어로 쓰인 이차 생산물 두가지 요소가 있다. 따라서 번역이란 개개의 번역을 결정짓는 원본과의 관계다. 그런데 이 관계라는 게 각양각색 일 수 있다. 가령 슐라이에르마허에게 번역은 두가지 주요 가능성이 있다. 독자를 필자를 향해 움직이게 하는 것, 즉, 엄격히 원본을 따라가거나, 혹은 필자를 독자를 향해 움직이는 것, 즉, 번역본을 독자가 가능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슐라이에르마허는 첫째 방법을 선호했다. 이것은 번역이 독자에게 어떤 이질감이 일게 하는 혹은 슐라이에르마허가 말하듯, “독자가 어떤 이국적인 것에 직면하고 있다는 인상" 을 준다는 뜻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초기의 낭만적 번역이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생각하듯 소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이질적이고 뭔가 다른, 이국적인 것을 환호했다. 험볼트는 심지어 번역가들이 외국어, 외국 문화의 이질감에 충실해서 그것이 번역에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않으면 그것은 원본이 아니라 번역가의 모국어, 모국을 배반하는일이 된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험볼트에게 번역의 충직성이 애국심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목적이 두 언어와 문화간의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국어를 건설하는 일이고, 험볼트가 언어와 국가를 동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실제 번역의 목적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문화 번역의 개념은 전통 번역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으로 1920년대 쓰여진 발터 벤야민의 비평문  “번역가의 과제"에서 처음 분명히 나타난다. “번역가의 과제"에서 벤야민은 전에 없이 사실상 원문이라는 개념을 없애버림으로써 전통 번역 이론의 이항 개념을 지워버렸다. 벤야민에게 번역이란 원문을 가리키는게 아니며 의사소통과는 아무관계가 없고, 그 목적이 의미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벤야민은 소위 원본과 번역의 관계를 접선에 비유해 설명한다: 번역은 원형(즉, 원본)의 오직 한 부분을 닿고는 멀어져 가버리는 접선과도 같다고. 원본이나 번역본, 원어나 번역된 언어 어느 것도 고정되고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둘 중 어느 것도 본질적인 자질을 갖고 있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벤야민의 글은 이렇게 본질적 기원의 개념에 강력한 질문을 던지는 까닭에 해체주의 이론가에게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이 해체주의자 전통에서 문화 번역의 개념이 생겨난다. 탈식민적 상황에 대한 특출한 학자 중 한 명인 호미 바바가 만든 용어다. 바바의 동기는 처음 다문화주의 이념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즉 독창적이고 본질적인 문화 주체성과 이러한 주체성에서 생겨난 공동체의 개념을 넘어선 문화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야 할 필요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주의할 것: 다문화주의 개념에도 문화번역도 있다. 소위 다문화 동거라 하는 그 정치적 목적은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충돌하지 않은채 얻어지는 자유 질서의 안정에 있다. 이것이 진보 다문화주의자들이 문화번역을 “문화 내 번역(inter-cultural translation)” 으로 이해하는 까닭이다.


문화번역의 개념: 호미바바- 주디 버틀러- 스피박

 호미 바바는 다문화주의가 문화 다양성에 꼼짝없이 집착한 채 주체 정치의 교착상태를 불러올 뿐이라고 보았다. 그 대안으로 바바는 제 3의 공간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의 저서 <문화의 위치>에서 말하는 제 3의 공간이란 혼종성, 전복, 이단, 위반 과 같은 개념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바바가 문화번역과 동일시하는 말인 ‘혼종성’의 개념 그 자체가 정치적으로 전복적이라고 믿는다. 혼종성은 이분법, 적대감, 이론과 정치 사이의 오랜 대항과 같은 전형적인 근대적 정치 개념이 더이상 성립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는 구식의 변증법식 부정의 개념 대신, 세상을 바꾸고 정치적으로 새로운 것을 야기 할 유일한 방법으로 협상 또는 번역을 이야기 하고 있다. 바바의 견해에 따르면, 정치 해방의 확장은 문화번역 논리를 따른 문화생산 분야에서만이 가능하다.

 미국 페미니스트 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바바의 문화번역 개념을 포스트모던 정치 사상중 가장 심각한 트라우마 중 하나인 앞서 언급한 보편성의 문제를 푸는데 도입한다. 버틀러는 문화가 보편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오늘날 세상을 경험하는데 보편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버틀러가 말하는 보편성은 비교 문화 번역의 문제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포함/ 배타 과정의 결과를 들여다보자.  

 버틀러의 공식은 이러하다. 보편성은 외부의 배제된 자들에 응답 함으로써만 분명해질 수 있다. 기존의 보편성 개념에서 배제된 자들은 받아들여지고, 이 개념에 포함되고 싶어하므로 -바로 외부에서- 이 개념에 압력을 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배제된 자들을 포섭하려는 필요성까지 개념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고, 이 압력은 마침내 기존 보편성 개념을 수정하게 한다. 배제된 자들이 다시 보편성에 허락되는 이 과정을 버틀러는 번역이라고 부른다. “배제된 자들의 귀환"의 입장에서 논의하는 문화 번역만이 오늘날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한계를 극복하고 사회변혁을 일으켜 새로운 해방의 공간을 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일상의 사회 관계를 바꾸는 전복적인 실천을 통해서 이뤄진다.

 다시 한번 강조해보자. 사회 변혁은 오래된 변증법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습에 거스름으로서 일어난다. 이것은 부정의 과정을 통해 사회의 적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기존의 사회 문화 관습을 거스르는 것을 통해서, 비폭력, 민주주의, 초국가적 협상을 통해서 일어난다. 버틀러가 말하는 문화번역을 통한 이 정치 변혁의 개념은 여전히 일반적으로 진보주의적인 골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흡사하게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 식민주의를 반영한 전제 하에서, 또 번역의 개념을 다루며 기술하지만 버틀러와는 달리 “전략적 본질주의”를 제시하면서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스피박은 오늘날의 이론 반영으로 우리가 대부분의 모든 가능한 주체성을 해체하고 단지 상상된 것으로 그 본질주의를 폭로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치는 마치 이게 우리의 환상인양 여전히 이러한 본질적 주체성 안에서 작동된다. 예를들어 국민국가라는 것이 그렇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진정 사회 변혁을 원한다면, “양심적으로 투명한 정치적 관심으로 실증주의적 본질주의를 전략적으로 활용” 해야한다고 제안한다. ([1])

 이것이 “전략적 본질주의” 개념도 일종의 번역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시대 역사적 상황은 포스트모더니즘 반본질주의 이론과 그것과 평행하게 구식 본질주의 정치 실천의 두가지로 언어로 표현된다. 스피박의 개념 “전략적 본질주의"는 이 두 언어 사이에 의사소통이 없다는 걸 인정한다. 이 둘은 제 3의 보편 언어를 써 구식 변증법을 통해 지양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일한 소통의 방법은 일종의 번역이다.

하지만 이 번역이 어떻게 가능한가? 정답은 1943년에 이미 주어진 듯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통해서:

“미합중국의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 앤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의 식당 주인도 왔다. 진지하게 준비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 때문에 시험에서 보칙(補則)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 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각하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를 해가지고 다시 왔으나 물론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는냐는 세번째 질문에 대하여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판사도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 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본 결과 노동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하여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가야트리 스피박 <다른 세상에서> Gayatri Spivak, In Other Worlds: Essays in Cultural Politics, New York : Methuen, 1987, p. 205.